저녁 만찬 샹들리에의 불빛이 어지럽게 산란한다. 새하얀 테이블 위에는 반짝이다 못해 미끄러질 것 같은 은식기가 놓여 있다. 다섯 개의 나이프. 네 개의 포크. 하나의 스푼. 네 개의 잔. 중앙의 접시는 흠 하나 없고, 그 위의 냅킨은 일회용임에도 질 좋은 섬유로 되어있다. 전채요리가 올라오면, 자연스럽게 뻗어진 손이 바깥쪽의 식기를 손에 쥔다. 오늘의 앙...
강 낚시 전투복을 걸쳐 입고 망토를 둘렀다. 유동성이 좋으면서도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는 착용감이 새삼 임무를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제와 딱히 걱정이 된다던가, 불안하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그때의 나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차림새니까. 이렇게 단정하고, 몸에 딱 맞으면서, 신분이나 위치를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
초상화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드러난 시야로 가장 먼저 비친 것은 붉은색이었다. 벽 한 면을 채울 것처럼 드리워진 커튼. 그 위에 금실로 수 놓인 자수가 컴컴한 조명에도 섬세하게 반짝였다. 손을 뻗어 그 사치스러운 천자락을 살짝 걷어낸다.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은 그림이었다. 어딘가 닮은 듯 닮지 않은 사람들이 단란한 모양새로 그려져 있는... ...
겨울 사냥 “툰트라요? 툰드라? 제가 들은게 맞나요? 툰-드라? 에이~ 제가 언제 안 간다고 하던가요? 가요, 가요. 이제 일어나요…” 누가 보아도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을 일순 내보였다 샥- 숨기고 웃어보였다. 물론 그럼에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동작은 굼뜨고 맥 없다. 평소에도 더운 것보단 추운 것이 견디기 편하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게 극지방...
검고 붉은 그것은 충동이었다.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루 중 마주치는 많은 경우의 수에서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선택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충동이었으니까.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시시각각 부채질하는 호기심 같은 것들에 대하여, 선택은 본능이되 그것의 해소는 이성일 수 있도록. 그러니 새삼스럽진 않다. 차라리 제법 소박한 편 아닌가? 지난 삶에 반...
삶은 언제나 지난하고, 죽음은 너무도 가깝다. 생존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산발적으로 흩어진 채 언제나 날을 세우고 있고, 그 모든 고통이 생을 포기한다는 선택 하나로 무용해진다. 그래서 죽고 싶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써도 건널 수 없는 진창에 스스로 빠져 죽지도 못하고 허우적대는 일이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죽는 편이 좀 더 쉽지 않나? 하나 ...
투두둑- 물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빠져나가 적막했던 사무실에 빗소리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제야 확인한 시계바늘은 이미 7시를 넘기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던가? 그러고보니 누군가 인사를 하고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하루종일 화면을 보고 있던 탓에 뻑뻑한 눈가를 문지른다. 분명 출근할 때 월급만큼만 일하...
오래된 풍경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그 속에서 때때로 재생될 때마다 더 눈부시게 빛나는 황홀경. 바래고 닳아 흐려질만도 하건만 잊지 못한,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왜 그리 선명히 각인된 순간인지도 모른 채 그저 손아귀에 쥐고 간혹 들여다보게 되는 기억의 단편, 그것은... 성역이었다. 영구동토 설탕을 쏟아놓은 것처럼 반짝이는 설원. 그 위에 산자의 발자국은...
"그거 알아? 암컷 토끼는 짝을 고를 때 직접 때려본대. 얼마나 튼튼한지 알아보려고." 림사의 에테라이트 앞에서 우연히 주워들은 말이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차피 도망치는데 가장 많은 힘을 쓰면서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였지만, 제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제법 설득력 있는 선별 방법이기도 했다. 그야, 제가 좀 때렸다고 홀랑 죽어버리면 곤란해지지 않...
당신은, 어느 봄 다섯시경 창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 떠오르는 해의 경이도, 가라앉는 노을의 쌉쌀함도, 여름의 열기도, 겨울의 혹한도 없이. 정오의 눈이 멀듯한 볕도, 늦은 밤 은은한 별의 반짝임도 없이. 그저 아릿했다. 투명한 물에 살짝 개어둔 다정한 색의 물감처럼 은은하게. 그래서 바라볼 수밖에 없어. 아무리 봐도 명확히 알 수가 없어. 하...
여름을 목전에 둔 계절의 사이. 어스름한 새벽이 와도 잠들지 못하면 잠겨 드는 순간이 있다. 어렴풋한 방 안의 건조한 온도, 열린 창문으로 부는 식어버린 바람, 올려다보면 머리맡에 드리운 감청색 하늘. 떠오르는 생각들은 안을 수 없을 만큼 부풀면서도 끝내 터지지 못하고 다만 사그라든다.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덧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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